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태 타이거즈 (문단 편집) === 해태의 좌타자 계보 === * [[김일환(1954)|김일환]] (1983~1987) * 1982년 [[롯데 자이언츠]] 창단 멤버였으나 이듬해 해태로 트레이드된 1루수. [[실업 야구]] [[한국화장품 야구단|한국화장품]] 시절에는 27경기 연속 안타라는 대기록을 세운 강타자였으나, 해태에서는 김봉연, 김성한 등에 밀려 잘해야 백업 신세였다. 1987년 태평양으로 이적하여 이듬해 은퇴할 때 까지 통산 성적은 타율 0.240, 76타점, 8도루였고 홈런은 한 개도 없었다. 그래도 [[최동원]] 상대로 9회에 동점타를 친적은 있다. 그리고 [[퍼펙트 게임(2011)|그 적시타로 인해 이 날 경기는 전설로 남게 되었다.]] * [[송일섭]] (1983~1988) * 1983년부터 해태에서 뛰기 시작한 좌타 외야수이다. 그가 그때부터 이적한 1988년까지는 1987년 박철우, 1988년 김성규 빼고는 그가 정말 말 그대로 유일한 좌타자였다. 1985년 해태에서 103경기 338타수 104안타 15홈런 41타점 타율 0.308을 기록했다. 이후 1989년 빙그레에서 반짝 부활한 것을 빼면, 주로 대타 전문으로 활동했다. 해태에서는 좌익수와 우익수로 뛰었고, 빙그레에서는 중견수도 봤다. * [[김성규(야구선수)|김성규]] (1988~1991) * 1988년 입단한 외야수이다. 해태의 좌타 갈증을 풀어줄 듯했으나 아마추어 시절에 쌓은 명성과 기대에 비해서 너무 못했다. 입단 첫해 80경기 출장해 타율 2할 8푼에 8도루로 나름대로 선전했다. 그런데 그 다음해 시즌의 1/3도 못 뛰고 타율은 1할 5푼대로 추락하더니 그 다음해도 겨우 80경기 뛰고는 0.245에 6타점 2도루. 1991년까지 뛰고 쌍방울로 이적해 1993년에 은퇴했다. 본인이 회상하기는 스스로 너무 게을렀다고 한다. * [[박철우(야구)|박철우]] (1987~1993) * 1987년 입단하였다. 포지션은 좌익수였다가 전성기 찍고는 지명타자로 활약하였으며, 가끔 1루수로 나오기도 했다. 1993년까지 해태에서 뛰었고, 1997년 쌍방울에서 은퇴한 선수. 큰 덩치와 느린 발로 전형적인 거포의 외형이었으나, 커리어 하이인 1989년 홈런이 13개였다. 타율도 3할을 넘긴 것은 1989년밖에 없었다(0.318). 하지만 좌타자가 그밖에 없었던 해태의 사정상 중심타선에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짧고 굵은 선수 생활을 했다. * 933경기 출장 2813타석 2487타수 695안타 58홈런 370타점 통산 타율 0.280 * 아들은 [[NC 다이노스]] 포수 [[박세혁]]이다. * [[박노준]] (1992) * 1992년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어 왔다. 1991년 OB에서 타율 0.293에 19도루의 준수한 성적으로 전성기를 계속 구가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92년 딱 서른이 되던 해 해태에서의 성적은 2할 4푼에 11도루. 그나마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게 사실상 해태 시절의 전부였다. 그리고 1시즌만 뛰고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 살림살이 어려운 3연속 OB-해태-쌍방울로. 보통 이런 경우(강팀-열악한 강팀-신생 팀)라면 그냥 어영부영 은퇴할 수도 있으나 쌍방울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는 보란 듯이 부활한다. 심지어 1994 시즌에는 OB 시절에도 못 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김응용이 가장 배아파했을 선수. 하지만, 이듬해 다시 추락하며, 1997년도에 은퇴한다. * [[김상훈(1960)|김상훈]] (1994~1995) * 2000년대 중반 위의 [[박노준]]과 함께 직구 아님 변화구, 초시계 드립으로 야구 팬들에게 욕을 먹던 SBS 스포츠의 전 해설위원이자 현 [[SPOTV]]의 해설위원. 그렇지만 해설위원 시절과는 달리 선수 시절은 미스터 청룡/LG라 불리운 [[MBC 청룡]]과 [[LG 트윈스]]의 대표 타자였다. 1988년 타격왕과 1990년 1루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이적 직전 시즌인 1993년에는 타율 0.285, 12홈런 71타점으로 주포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 연봉 협상 마찰과 올스타전 [[쪼인트]] 사건으로 [[한대화]]와 사이가 안 좋던 해태와 [[송구홍]]의 입대, 김상훈의 하락세에 의구심을 가지던 LG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1993년 12월 1일 [[한대화]], [[신동수(1966)|신동수]], [[허문회]], 김봉재 - 김상훈, 이병훈의 트레이드가 성사된다. 당시 전문가들은 해태의 승라라고 생각했으나... 1994 시즌이 시작하자 트레이드의 핵심이었던 김상훈은 부상에 시달리며 2할 3푼대로 주저앉은 반면 한대화는 타율 0.297, 10홈런 67타점으로 부활에 성공하였다. 결국 이해 무너진 김상훈은 1995 시즌까지 뛰고 은퇴를 선언, 이 트레이드는 해태에게 [[흑역사]]가 되었다. * [[박재용]](1994~1999) * 이전 왼손잡이 박철우의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을 만큼 코감독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하필 후계자라는 작자가 선배의 성적을 단 한 번도 못 넘긴 것이 컸다. 수비도 당시에 별로여서 지명타자와 1루수를 번갈아 볼 정도였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재용은 [[청각장애]]에 가까울 정도로 중증 수준의 난청 질환을 겪었고 [[똥차(야구)|발까지도 느려서]] 외야수로 등록됐음에도 외야 수비를 거의 보지 못했다. 타구음을 듣고 낙구 위치에 가야 하는 외야수의 특성상 난청과 느린 발을 동시에 가졌던 박재용에게 외야 수비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1996년 한국시리즈|두]] [[1997년 한국시리즈|번]] 우승도 맛보고 우승 프리미엄에 경쟁자가 별로 없던 운 좋은 시즌을 만나 [[KBO 골든글러브]] 투표 [[지명타자]] 부분에서 2연패를 했다. 그러나 이후 성적이 별로였고 바로 밑에 후술하게 될 [[장성호|후배 선수]]가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바람에 1999 시즌 중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됐다. 은퇴는 팀이 [[SK 와이번스]]로 바뀐 2000년에 하였다. 2019년까지 [[롯데 자이언츠]] 2군과 3군 코치 역임. * '''[[장성호]]''' (1996~2010) * 해태가 길러낸 유일무이한 스타급 이상의 좌타자이다. [[김응용]] 감독의 신뢰를 바탕으로 데뷔 시즌 개막전부터 선발로 기용되었고 이듬해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3년차인 1998년부턴 리그의 강타자로 성장했으며 [[홍현우]]와 함께 해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눈야구의 달인답게 장타력이 탑급이 아님에도 볼넷을 얻어내는 데에는 특출난 선수이자 [[세이버메트릭스]]로 인해 평가가 더욱 좋아진 선수, 이후 KIA로 팀이 인수가 되고 나선 복귀한 [[이종범]]과 함께 팀을 이끌며 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의 위치까지 올랐고 9년 연속 3할을 기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의 위상으로까지 올랐다. 타이거즈를 상징하는 선수로 V10까지 함께 했지만 팀과의 불화로 타이거즈를 떠나게 되며 아쉬운 마무리를 하게 된다. 꾸준히 활약한 선수가 없어 사실상 계보라기 보단 잔혹사에 가까운 타이거즈 좌타자 중 유일하게 레전드로 성장한 선수로 팀에 상당한 기여를 하며 이견이 없는 타이거즈의 영구결번 후보이며 타이거즈의 무수히 많은 영구결번 후보들[* [[김응용]], [[김봉연]], [[김성한]], [[이순철]], [[한대화]], [[이강철]], [[조계현]], [[홍현우]], [[장성호]], [[양현종]]] 중 유일한 좌타자이다. * [[동봉철]] (1996.05~1996.11) * 신인 시절인 1992년 3할-두자릿수 홈런-20도루로 [[삼성 라이온즈]]의 톱타자로 활약했으나 방위시즌인 1993년을 정점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거기에 [[양준혁]], [[최익성]], [[신동주(야구)|신동주]]가 외야주전을 차지한데다가 [[백인천]] 삼성 감독과의 불화가 겹쳐서 잉여자원이 된 1996년에 [[김태룡(1968)|김태룡]]과 같이 [[이병훈(야구)|이병훈]], [[김훈]]을 상대로 해태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는 1할 중후반의 타율에 그치며 패망. 결국 우승 반지만 득템하고 96년 11월에 LG로 이적하면서 [[저니맨]] 커리어를 쓰기 시작한다. * [[최훈재]] (1996.11~1998.12) * LG에서는 [[김재현(1975)|김재현]]과 [[박준태(1967)|박준태]][* 이 선수 시즌 초만 되면 날아다니고 중반부터 서서히 알아서 기울어지는 전형적인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DTD]] 선수], [[노찬엽]], [[심재학]] 이라는 거물급에 밀려서 왼손 대타-외야 백업 역할이었고 96년 11월 6일에 [[최향남]]을 상대로 트레이드를 되어 해태로 오게 되었다.[* [[동봉철]]과 [[송유석]]은 1996년 11월 5일, LG의 [[조현(1976)|조현]]을 상대로 트레이드 된 상황이었다. 트레이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다음날에 [[최훈재]]와 [[최향남]] 트레이드가 이루어진다.] 해태에서의 2년간은 97년엔 3번 타자로 뛰며 우승을 이끄는 등 상당히 준수한 기량을 보여주면서 [[탈쥐효과]]를 입증하나 싶었으나, '''트레이드 당시 LG로 건너간 [[최향남]]의 포텐이 터지면서 묻혀버렸다.''' IMF 이후 재정난이 심해진 해태는 최훈재를 1998 시즌 종료 후 [[두산 베어스]](당시 OB)로 넘기면서 그와 해태의 인연도 끝나게 된다. 신기하게도 그가 몸 담은 시절 3팀 모두 우승을 하는 진기록을 보았다. * [[양준혁]] (1999) * 1999년에 주전 외야수로 뛰면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는 했으나, 해태에 오기 싫다고 트레이드 거부를 외친 점이나, 양준혁의 맞트레이드 상대인 손혁 역시 해태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은퇴를 선언했다가 복귀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지 이 계보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타이거즈 팬들 사이에서 이미지도 별로 좋지 못하다. 물론 이는 올드팬 한정으로 현재는 해태에서 뛴지도 20년이 넘은지라 양준혁이 해태에서 뛰었는지도 모르는 팬이 생길 정도로 타이거즈 팬덤도 누그러진 상태고 양준혁은 정작 해태에서 뛰고나선 해태에 대해 절대 나쁜 말을 하지 않아[* 오히려 해태에 대해 우호적인 언사를 많이 했다. 당장 본인이 쓴 책에서도 처음엔 그랬지만 막상 와보니 상당히 괜찮았다고 회고를 했으니...] 현재 타이거즈 팬들 사이에서의 이미지가 나쁘지는 않다. * [[트레이시 샌더스]] (1999) * 40년 가까이 된 타이거즈 역사상 한 시즌 최다 홈런의 주인공이자 타이거즈 선수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0홈런을 친 외국인 선수. 타율은 .247로 평균만도 못했고 무려 133개의 삼진을 당했으나 4할이 넘는 출루율과 6할에 가까운 장타율로 뛰어난 득점 생산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이버메트릭스 및 OPS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으며, 낮은 타율과 많은 삼진으로 인해 저평가 당했다. 게다가 이미 개막장으로 몰린 해태구단의 재정으로 인해 재계약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2000년에 팀 최다 홈런 선수가 14개인 장성호, 홍현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코감독은 시즌 내내 샌더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샌더스보다 홈런은 좀 적지만 해태의 마지막 4번 타자로 이름을 남겼고 팀명이 KIA로 바뀌고 나서도 정규 시즌 3할을 기록한 산토스가 오며 다소 위로를 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